전체 글 12

두고 간 게 있어서요.

몇 걸음 내려간 그녀가 뒤돌아봤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엔 아쉬움이 어려있었다. 그녀가 미소 짓자 그도 괜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나 더 갔을까. 그와 헤어진 지 오분쯤 지났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시만요 어디에요? 두고 간 게 있어서요, 다시 올래요?" 순간 그녀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녀는 높아진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네, 다시 갈게요." 차분하지만 들뜬 목소리로. 그녀는 끊자마자 당장 뛰어가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돌아섰다. 천천히 하지만 힘 있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두근거렸다. 가늘지만 깊은 그의 눈빛과 선홍빛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녀는 입가의 미소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머리를 쓸어..

생각 2022.03.12 (16)

사람 마음이 참 그래요.

사람 마음이 참 그래요. 자꾸 생각나서 보고싶다가도 어느새 잊고 지내죠. 잘지내냐는 한마디가 뭐 그렇게 어려워서. 요즘은 잘지내냐는 말이 필요 없어졌어요. 묻지 않아도 이미 잘지내고 있는 걸 알고 있는 걸요. 1년전 쯤엔 문자가 왔어요. 오랜만에 서울에 왔다고 잠깐 볼 수 있냐고요. 근데 안나갔어요.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두려웠던 건지도 모르죠, 다시 시작될까봐. 그 사람은 왜 다시 연락했을까요. 우리 사이에 남아있는 것도 없는데 말이죠. 연락 오길 바랬으면서, 막상 오니까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냥 하지 말지. 그랬다면 지금도 전 그 사람을 그리워했을거에요. 그 때 찍어 준 사진,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편지도요. 아마 창고 한 켠 사진첩들 사이에 있을거에요. 글쎄요, 그대로인 게 ..

생각 2022.03.12

아직 오지 않는 나날들

시간이 흐른 지금, 저는 일하던 곳을 나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담고 있던 곳은 더 이상 저의 자리가 아니에요. 텅 빈자리엔 누군가 다시 앉을 테죠. 그 자리의 주인은 없었어요. 전 잠시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였어요. 행복하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저는 떠났습니다. 그간의 1년이 그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까요. 제 자신을 의심하고 남을 탓하고 욕했던 지난 나날들, 저는 과연 1년 전의 저보다 더 자랐을까요? 재보아도 그대로인 키, 저는 아마 자란 게 아닌지 몰라요. 어쩌면 시야는 넓어졌을지 모르죠. 세상이 넓은 만큼, 다양한 공간 속에 다채로운 사람들 보았죠. 어렴풋이 기억나요. 남의 눈으로 날 돌아봐요. 가장 좋았던 순간은 아마 활짝 웃고 떠들었던 순간이겠죠. 함께 할 때요, 그때가 가장 좋..

생각 2022.02.13 (32)

하얗게 눈으로 덮였다.

늦은 저녁이었다. 그녀는 떨린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내가 돌아보자 그녀도 돌아봤는데,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이렇게 속삭였다. ‘대박’ 그 소리가 묘하게 나를 건드렸다. 나도 ‘대박'이라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처음 마주친 단 몇 초 사이에, 여러 빛깔의 감정이 오갔다. 그녀는 자리에 앉았고 나는 약간의 신남을 느꼈다. 떨림, 설렘보다 신남. 그녀의 말들은 새소리였다가 고요한 물도 되었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그 소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는데, 내 눈에 너무 아름다운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느다랗고 긴, 하얗고 선명한 그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되뇌었다. ‘예쁘다' 내 소리를 들었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순간에 그녀가 내 안에 들어왔다. 그러자 난 고장나버렸다. 고장 난 입과 귀로 난 모든 ..

생각 2022.02.13

비긴 어게인 (Begin Again) - 라면 한 그릇

요즘은 어때- 라는 나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학업, 건강, 연애, 가족 등 다양한 카테고리 중에 그 친구는 '연애'를 택한 것 같다. 그냥 뭐, 잘 지내- 라는 그의 말에는 의미심장함이 담겨있다. 가운데에 쉼표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찰나의 호흡으로 인해 해설지는 두 개가 된다. 연애에 적신호가 생겼거나 그냥 별 의미 없거나. 밥은 먹었냐- 라는 나의 질문에는 한 가지 의도가 담겨있다. 안 먹었으면 밥이나 먹자 라는 의도. 그 친구가 요즘 단골이라는 곳에 가니 사람이 많아서 기다려야 했다. 그곳은 종각이었고 아저씨가 꼼장어를 굽고 있었다. 사실 나도 예전에 많이 왔던 곳이다-라는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했다. 여기 맛있지, 걔가 여기 좋아해- 라는 그의 말에 대한 해석은 더 이상 ..

생각 속 영화 2020.07.2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