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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간 게 있어서요.

몇 걸음 내려간 그녀가 뒤돌아봤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엔 아쉬움이 어려있었다. 그녀가 미소 짓자 그도 괜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나 더 갔을까. 그와 헤어진 지 오분쯤 지났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시만요 어디에요? 두고 간 게 있어서요, 다시 올래요?" 순간 그녀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녀는 높아진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네, 다시 갈게요." 차분하지만 들뜬 목소리로. 그녀는 끊자마자 당장 뛰어가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돌아섰다. 천천히 하지만 힘 있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두근거렸다. 가늘지만 깊은 그의 눈빛과 선홍빛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녀는 입가의 미소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머리를 쓸어..

생각 2022.03.12

사람 마음이 참 그래요.

사람 마음이 참 그래요. 자꾸 생각나서 보고싶다가도 어느새 잊고 지내죠. 잘지내냐는 한마디가 뭐 그렇게 어려워서. 요즘은 잘지내냐는 말이 필요 없어졌어요. 묻지 않아도 이미 잘지내고 있는 걸 알고 있는 걸요. 1년전 쯤엔 문자가 왔어요. 오랜만에 서울에 왔다고 잠깐 볼 수 있냐고요. 근데 안나갔어요.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두려웠던 건지도 모르죠, 다시 시작될까봐. 그 사람은 왜 다시 연락했을까요. 우리 사이에 남아있는 것도 없는데 말이죠. 연락 오길 바랬으면서, 막상 오니까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냥 하지 말지. 그랬다면 지금도 전 그 사람을 그리워했을거에요. 그 때 찍어 준 사진,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편지도요. 아마 창고 한 켠 사진첩들 사이에 있을거에요. 글쎄요, 그대로인 게 ..

생각 2022.03.12

아직 오지 않는 나날들

시간이 흐른 지금, 저는 일하던 곳을 나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담고 있던 곳은 더 이상 저의 자리가 아니에요. 텅 빈자리엔 누군가 다시 앉을 테죠. 그 자리의 주인은 없었어요. 전 잠시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였어요. 행복하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저는 떠났습니다. 그간의 1년이 그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까요. 제 자신을 의심하고 남을 탓하고 욕했던 지난 나날들, 저는 과연 1년 전의 저보다 더 자랐을까요? 재보아도 그대로인 키, 저는 아마 자란 게 아닌지 몰라요. 어쩌면 시야는 넓어졌을지 모르죠. 세상이 넓은 만큼, 다양한 공간 속에 다채로운 사람들 보았죠. 어렴풋이 기억나요. 남의 눈으로 날 돌아봐요. 가장 좋았던 순간은 아마 활짝 웃고 떠들었던 순간이겠죠. 함께 할 때요, 그때가 가장 좋..

생각 2022.02.13

하얗게 눈으로 덮였다.

늦은 저녁이었다. 그녀는 떨린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내가 돌아보자 그녀도 돌아봤는데,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이렇게 속삭였다. ‘대박’ 그 소리가 묘하게 나를 건드렸다. 나도 ‘대박'이라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처음 마주친 단 몇 초 사이에, 여러 빛깔의 감정이 오갔다. 그녀는 자리에 앉았고 나는 약간의 신남을 느꼈다. 떨림, 설렘보다 신남. 그녀의 말들은 새소리였다가 고요한 물도 되었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그 소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는데, 내 눈에 너무 아름다운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느다랗고 긴, 하얗고 선명한 그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되뇌었다. ‘예쁘다' 내 소리를 들었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순간에 그녀가 내 안에 들어왔다. 그러자 난 고장나버렸다. 고장 난 입과 귀로 난 모든 ..

생각 2022.02.13

비긴 어게인 (Begin Again) - 라면 한 그릇

요즘은 어때- 라는 나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학업, 건강, 연애, 가족 등 다양한 카테고리 중에 그 친구는 '연애'를 택한 것 같다. 그냥 뭐, 잘 지내- 라는 그의 말에는 의미심장함이 담겨있다. 가운데에 쉼표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찰나의 호흡으로 인해 해설지는 두 개가 된다. 연애에 적신호가 생겼거나 그냥 별 의미 없거나. 밥은 먹었냐- 라는 나의 질문에는 한 가지 의도가 담겨있다. 안 먹었으면 밥이나 먹자 라는 의도. 그 친구가 요즘 단골이라는 곳에 가니 사람이 많아서 기다려야 했다. 그곳은 종각이었고 아저씨가 꼼장어를 굽고 있었다. 사실 나도 예전에 많이 왔던 곳이다-라는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했다. 여기 맛있지, 걔가 여기 좋아해- 라는 그의 말에 대한 해석은 더 이상 ..

생각 속 영화 2020.07.28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모르기 때문에

"알 것 같아서, 더 알고 싶지 않아." 자만에는 미덕이 없고, 핑계는 만들어진다. 지나간 선택의 잔상은 길다. 알아채지 못했고 착각할 용기도 없이 기회를 외면했다. 섣부른 체념은 긴장을 완화시키지만, 냉소와 침묵을 만든다. 그것으로 함께할 시도조차 잠재운다. 봄이 그랬고 여름이 그랬으며, 가을 겨울도 그렇게 꺼졌다. 단지 아직 알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나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알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지레 겁먹고 숨거나 기대하지 않으려 하는 습관은 새로운 습관을 만든다. 지난 경험의 무게는 무겁다. 선택과 판단은 과거의 경험으로 빚어지고 그 경험으로 인한 망설임은 가능성을 없앤다. 사람에 대한 추측은 수많은 가능의 가지를 자른다. '알 것 같..

생각 속 영화 2020.07.28

라스트 나잇(Last Night) - cobalt blue,파란, 波浪

시간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 모든 게 빠르게 흐른다. 비가 그쳤는지도 모르고 매일 우산을 든다. 파랗고 진한 우산. 우산 끝에 고인 물이 바닥에도 고였다. 고인 물은 썩는다. 낡은 우산 몇 개를 버리자 한 개의 우산만 남았다. 파랗고 진한 우산. 겨울인데 눈 대신 비가 내린다. 그날은 작년 12월. 두껍고 긴 코트는 소복이 습기를 머금은 채 술집으로 들어섰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소리 건너에 날 기다리는 두 사람. 10년 전의 나를 아는 그들을 5년 만에 만났다. 긴 담소로 긴 밤을 지새웠고, 멀리 떠날 이미 떠난 그 친구 그러니까 그녀 옆에 파란 우산을 보았다. 코발트블루빛의 그것. 집에 있는 것이 생각나 장 구석에 있던 파란 우산을 꺼냈다. 선망과 호감의 대상, 일반적 조건들 위에 모든 걸..

생각 속 영화 2020.07.28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 - 조용함에 대한 시선

가끔 모르는 사람들의 순간 속에서 미처 몰랐던 것을 발견한다. 어제는 길을 걷다가 나란히 걸어가는 노부부를 보았다. 그리고 스치듯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를 보러 갔던 날, 옆자리에 한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와 남자가 앉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팝콘을 나눠 먹으며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러다 여자가 남자에게 속삭인다. 시시콜콜한 평범한 이야기들. 꼭 서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그런 얘기를 잠시 나눈 그들은, 말없이 다시 팝콘을 먹는다. 그때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말이 없었다. 그들을 본 건 몇 개월 전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잊히지 않는 이유는 둘 사이에 자리한 감정선이 너무나 선명했기 때문이다. 딱히 뚜렷하지 않은 평범한 순간이 아주 가끔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내..

생각 속 영화 2020.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