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속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모르기 때문에

ssooonn 2020. 7. 28. 17:58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중

 

"알 것 같아서, 더 알고 싶지 않아." 자만에는 미덕이 없고, 핑계는 만들어진다.

지나간 선택의 잔상은 길다. 알아채지 못했고 착각할 용기도 없이 기회를 외면했다. 섣부른 체념은 긴장을 완화시키지만, 냉소와 침묵을 만든다. 그것으로 함께할 시도조차 잠재운다. 봄이 그랬고 여름이 그랬으며, 가을 겨울도 그렇게 꺼졌다.

단지 아직 알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나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알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지레 겁먹고 숨거나 기대하지 않으려 하는 습관은 새로운 습관을 만든다. 

지난 경험의 무게는 무겁다. 선택과 판단은 과거의 경험으로 빚어지고 그 경험으로 인한 망설임은 가능성을 없앤다. 사람에 대한 추측은 수많은 가능의 가지를 자른다. '알 것 같다'는 착각은 그것에서 시작된다. 

처음엔 달랐다고 할 수도 있다. 미리 판단을 보류하고 그 마음으로 들어가기 위해 껍질을 벗기고 또 벗겼다. 알고 싶은 욕망, 단순하지 않은 그 호기심의 원동력은 무지에 있었다. 모름은 앎을 충족시키기 위한 전제이자 수단이다. 그리고 행동할 근거와 원인이 된다. 그 전제의 받아들임은 마땅한 핑계였다. 그래서 '너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은 '널 알고 싶다'는 이유가 됐다. 그렇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만나야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널 안다'는 생각도 깊어진다. 그치만 그게 과연 진짜 '앎'일까. 지나간 사람에 대해 난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널 안다'는 착각과 오만은 되려 익숙함과 권태를 낳는다. 그 앎마저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서로를 뜯고 할퀸다. 그렇게 착각과 오해 속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쩌면 누군가를 온전히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여러 만남의 경험이 축적될수록 꼰대가 되어간다. 낡은 고지식으로 무장한 채 선입견과 일반화에 둘러싸인다. 그것의 잔재가 커지고 '안다'는 인식도 커진다. 언제쯤 이 착각에서 자유로울까.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 자각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나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깊이 아는 바가 없었고, 없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모른다'와 '안다'의 차이는 크다. 그 인식의 확신은 다른 결말을 야기할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의 둘은 서로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태양이 떠오르면 헤어질 걸 알면서도, 서로를 알아가길 주저하지 않는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가정을 이룬 그들은 현실을 알아간다. 그렇지만서로에 대해서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린 서로를 모르기에 더 알고 싶고, 서로를 온전히 안다는 건 불가능하기에, 서로의 존재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연애 뿐만 아니라 모든 만남에 적용되지 않을까.

언제나 [비포 선라이즈] 일 수 없고, 현실이 꼭 [비포 미드나잇]은 아닐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