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속 영화

비긴 어게인 (Begin Again) - 라면 한 그릇

ssooonn 2020. 7. 28. 18:27

영화 <비긴 어게인>(Begin Again) 중

요즘은 어때-
라는 나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학업, 건강, 연애, 가족 등 다양한 카테고리 중에 그 친구는 '연애'를 택한 것 같다. 

그냥 뭐, 잘 지내-
라는 그의 말에는 의미심장함이 담겨있다. 가운데에 쉼표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찰나의 호흡으로 인해 해설지는 두 개가 된다. 연애에 적신호가 생겼거나 그냥 별 의미 없거나.

밥은 먹었냐-
라는 나의 질문에는 한 가지 의도가 담겨있다. 안 먹었으면 밥이나 먹자 라는 의도.

그 친구가 요즘 단골이라는 곳에 가니 사람이 많아서 기다려야 했다. 그곳은 종각이었고 아저씨가 꼼장어를 굽고 있었다. 사실 나도 예전에 많이 왔던 곳이다-라는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했다.

여기 맛있지, 걔가 여기 좋아해-
라는 그의 말에 대한 해석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친구는 이 집을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고 있고, 난 이 집을 좋아했던 누군가를 만났었다.

붉게 양념된 꼼장어가 익어 고소한 냄새를 풍길 때, 마늘을 곁들여 깻잎에 싸고 입에 넣으면 정말 맛있다. 맛있다-라는 단어 말고는 달리 표현되기 힘들다. 거기에 소주 한 잔 탁, 넘기면 딱이다. 장어의 느끼함을 적당히 잡아준다. 꼼장어엔 역시 소주다. 

있잖아, 나 요즘 맛집은 다 알아. 추천해줘?- 
라고 그가 말한다. 그 말을 듣자 약간의 기시감이 들었다. 

그는 연인에 대한 애정도 깊지만 맛집에 대한 애정도 깊다. 단순히 맛집을 찾아가 인증 사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그녀는 사진 찍기 전에 먼저 먹어버려서 스스로가 항상 좀 아쉬워한다고 했다. 그래서 본능에 충실한 분 같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도 본능에 충실했었지-
라고 되뇌다 보니 어느새 집이다. 다음날 늦은 아침은 토요일이었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뭐 먹을지 잠깐 고민을 하면, 내 앞엔 라면 봉지가 놓이게 된다. 이번에도 라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도파민이 분비된다-
어디선가 흘려들은 정보는 괜히 이런 때에 나타난다. 그래서 라면을 끓이며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도파민이 두 배로 분비되려나. 하지만 분비되긴 하는지, 나오다 만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난 분명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음악도 들었는데 말이지. 

그러다 마침내 라면 국물만 남았다. 국물을 뜨는데, 그 위에 뜬금없이 뭔가가 떠오른다. 말없이 고깃집 된장찌개를 먹던, 정확히 말하자면 된장찌개에 몰두하던 그때 그녀가 두둥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 보니 야근 중인 사람, 책 읽느라 내릴 역을 놓친 사람, 맛있게 먹느라 인증 사진을 못 찍는 사람 등 모두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다. 책 [데미안]의 데미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때, 싱클레어가 모닥불을 깊이 응시할 때, 나는 이 장면들이 몰입의 순간을 예찬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골똘히 몰입하고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 순간에는 오직 몰입하는 사람과 몰입의 대상만 존재한다. 현실에 존재하지만 내면 먼 곳으로 여행하는, 동시다발적으로 두 세계에 공존하는 모습에서 강하고도 미약한 응집이 느껴진다. 마치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득히 깊은 바닷속을 느끼는, 주먹을 꽉 쥐었을 때의 강하고도 미약한 힘처럼.

그런 의미에서 맛있는 식사는 두 사람의 몰입이 만날 수 있는 순간이다. 함께 몰두할 수 있는 수많은 행동들 중에서 가장 쉽고도 단순한 일. 정성과 시간이 담긴 맛있는 음식 앞에 맛을 공유하고 서로를 공유한다. 미각과 후각 그리고 시각과 청각의 자극이 동시에 일어나는 테이블 위는 그래서 아주 흔하지만 매력적인 순간이다.

식어가는 라면 국물에서 본 것은 어떤 그리움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맛있는 식사에 대한.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 문장 앞에는 '함께'라는 단어가 중복되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역시 혼자 먹는 밥보다 같이 먹는 밥이 더 맛있다.
Y 잭 하나로 같이 음악 듣던 [비긴 어게인]의 두 남녀처럼.